출처
세계일보
작성일
2019. 03.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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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윤정의 원더풀 발칸반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교훈 가슴에 담고… "굿바이 발칸"

[박윤정의 원더풀 발칸반도] '네 이웃을 사랑하라' 교훈 가슴에 담고… "굿바이 발칸"

[박윤정의 원더풀 발칸반도] 끝·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수도 사라예보(2)

뿌듯한 마음으로 선물 포장을 가방에 넣고 사라예보 상징 중 하나인 세빌리 분수 근처로 걸었다. 많은 비둘기와 관광객이 모여 있다. 단체 관광을 하는 학생들이 분수를 배경으로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고, 오가는 사람들 모습이 평화로운 관광지의 풍경을 선사하고 있다.

1532년에 완공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최대 이슬람 사원이자 발칸 제국 주요 오스만 건물 중 하나인 모스크. 이슬람 사원과 오스만 건축물들은 낯선 느낌 없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구 시가지의 관광명소로 자리한다.

사라예보는 다양한 문화가 만나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낸다. 오스만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위대한 제국들 통치 아래 여럿 흔적을 남긴 도시이기도 하다. 다양한 종교가 함께하는 관용적인 사회라는 것은 100m 반경 안에 있는 여러 사원과 성당에서 찾을 수 있다. 성가와 이슬람 기도가 함께 울리는 이곳은 우리가 모르는 또 다른 모습이 있었을 듯하다. 빗방울에 맺힌 정통 커피 향기와 오래된 마을의 역사적인 모습, 그리고 친근한 사람들, 도시 한편에서 그들의 영혼을 느끼며 호텔로 향한다.

사라예보 구시가지 거리 모습.

 

아침에 가이드를 따라 나선 사라예보 거리는 찬란한 문화유산과 아픈 역사를 설명한다. 되돌아오는 길에는 그 기억을 새기고 아픔을 발걸음에 묻었다. 내전 당시 무차별적인 저격이 이뤄졌다는 저격수의 골목을 지나쳐 현대적 건물들을 바라보며 새로운 사라예보를 마주한다.

구시가지. 바슈카르지아 광장 주변에서 영화 촬영을 하고 있다.

 

예수 성심 성당과 세르비아 정교회 성당. 1997년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평화와 관용의 메시지를 전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동상이 인상적이다.

 

사라예보에서 건설된 가장 호화로운 건물 중 하나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국립대학 도서관(Vibe?nica)은 내전시기 화염에 휩싸이며 사라예보의 공포와 비극의 상징이 되었다가 재건되었다. 그 밖에 주요 건물들과 쇼핑센터 등도 새롭게 들어서면서, 보스니아는 정치적 안정과 경제성장을 통한 새로운 도시 모습으로 변모하고 있다. 동구권 건축물보다 훨씬 개방적이고 서유럽 스타일에 가까운 사회주의 유고슬라비아 모더니즘 스타일은 오늘날의 사라예보를 이끌어낸다.

 

사라예보 구시가지를 이곳저곳 둘러보느라 지친 다리를 쉬기 위해 운치 있는 식당에 자리했다. 때마침 빗방울도 떨어지고 허기도 몰려온다. 테이블이 가정집처럼 소박하게 꾸며져 있고 부엌에서 음식을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 실내에 앉고 보니 이 지역 음식을 하는 맛집이다. 엄마가 음식을 만들고 아들이 주문을 받는다.

총성은 멎었지만 깊은 상처를 안은 보스니아는 정치적으로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 중심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과 세르비아인 중심의 스릅스카 공화국으로 이루어진다. 구성 민족은 보스니아인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이다. 공식 언어 역시 크로아티아어, 보스니아어, 세르비아어이다. 언어는 같지만 공식적으론 서로 다르게 분류되어 내전 뒤엔 세르비아어와 크로아티아어로 나눠 버렸다. 같은 언어를 말하는 사람들을 종족에 따라 서로 다른 언어라고 일컫는 현실이다. 문자도 세르비아계와 무슬림의 키릴 문자, 크로아티아계의 라틴 문자가 혼용되는 ‘세 개의 종족, 두 개의 문자, 하나의 나라’,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비이성적 종족갈등이 인간 이성의 한계를 넘어 어떤 극단적 사태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준 현장이 바로 사라예보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니 다행스럽게 빗방울이 작아진다. 우산은 없지만 맞을 만하여 구시가지로 나섰다. 카페 차양 아래 물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바라보니 호기심에 발걸음이 느려진다. 멈칫하는 내 모습이 신기한지 자리를 내어준다. 물담배 한 모금의 향이 코끝을 간질인다. 마시는 향이 온몸에 퍼지는 경험을 하고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진한 커피 향으로 다시 숨을 내어 쉬고 쇼핑에 나섰다. 빗방울 떨어지기 전 유리창 너머 봤던 전통 공예품을 둘러본다. 생각보다 높은 가격이지만 머리가 흰 멋진 할아버지가 집중하여 만드시는 것을 보니 쉽게 손에서 내려놓지 못한다. 장식품보다 일상에서 사용할 수 있는 물건으로 황동 커피 그라인더를 사기로 하고 망설임을 버렸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인 1918년 국제사회가 발칸 남부의 여러 슬라브족을 합쳐 만들어준 나라 유고슬라비아는 사라지고 이제는 분리되고 독립된 발칸을 여행하며 많은 생각이 들었다. 발칸여행은 아름다운 풍경사진 한 장으로 설렘을 갖고 준비되었지만 피터 마쓰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책을 읽으며 전쟁의 아픔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여행이 되었다. 워싱턴 포스트 특파원이 경험한 생생한 유고 내전의 체험담이 섬뜩하여 잠 못 이루게도 했지만 여행의 기대감도 갖게 했다. 이제 여행을 마치며 저자 글들이 떠오른다. 세계는 아직 전쟁을 잊지 않았지만 이미 그 교훈은 잊어버린 것은 아닌가.

 

발칸은 오랜 전쟁 아픔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자연과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로 기억된다. 아드리아해의 푸르고 아름다운 바다와 발칸 산맥의 웅장함이 조화를 이루는 그곳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와 역사를 꿈꾸고 있었다. 동서양의 접경에서 종교와 문화가 융화되고 사람들이 함께 어울리며 살아가는 그곳이 우리 인류의 현재이자 미래는 아닐까.

여행가·민트투어 대표